냉혹한 무림의 사계절
소설 속 무림은 절대 낭만적이지 않다. 주인공을 포함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악한 인물이다. 오히려 선한 사람은 죽거나 다치고, 악인들조차도 자신의 선한 면이나 인간적인 면 때문에 죽거나 다친다.
예를 들어 주인공부터 구제 불능의 악인이다.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공금횡령 및 도박, 사부 폭행, 사문 방화를 저지르고 도망쳐온 도망자 신세이다. 심지어 그 도망쳐온 도시에서도 도박장을 전전긍긍하다가 사파 조직으로부터 살인 청부를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또한 원한을 가진 상대와 한 목적을 위해 동료가 되기도 하고. 정이 들 무렵 서로 죽이기도 한다. 가족을 인질로 잡는 것도 서슴지 않으며. 심지어 가족의 정을 이용하여 목적을 이루기도 한다.
멋지게 기를 쓰며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도 없다. 뛰어난 무인도 총에 맞으면 죽고. 천하제일인도 암수에 당해 허무하게 무너진다.
대부분의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의 경우에는 정말 처절하게 속임수를 쓰고, 독과 총을 쓰며 싸우고, 살아남는다. 무술 실력에서 압도해도 갑옷을 잘 입고 독을 잘 쓴 사람이 이긴다. 상대를 더 잘 속이는 쪽이 살아남는 잔혹하고 현실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이니 일어나는 사건도 잔혹하다. 한 도시에서의 암투에서 시작한 사건은 여름을 지나 겨울이 갈수록 더욱더 크고 잔혹해진다. 점점 주인공이 감당하기 힘든 단체와 사람들이 주인공을 쫓고, 주인공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소설은 진행된다.
하지만 따뜻하다
무림의 계절은 여름에서 겨울이 될수록 잔혹해지지만, 그 안에는 인간적이며 따뜻한 감정이 있다. 등장인물들은 악인이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신만의 가치관과 선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좋은 사람도 있다. 곧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해결사를 하다가 개과천선하여 승려가 되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자기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군가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생겨 자신의 신념을 꺾기도 한다.
주인공 담진현도 그렇다. 온갖 나쁜 짓은 다 벌이면서 다니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을 지키고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제만큼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선한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한상운 작가의 세밀한 묘사와 센스 있는 표현들은 냉혹한 무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인간적인 감정들을 세세히 느끼게 해준다.
블랙 코미디 무협 소설
이렇게만 보면, 무거운 소설인 것 같다. 하지만 작가의 센스있는 유머 코드와 필력으로 유쾌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인물의 감정묘사는 세밀하고 설득력 있다. 대사와 이야기 흐름은 자연스럽고. 배경 묘사는 적절하고 진부하지 않다. 정신없이 읽다가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소설이다.
주인공의 성장기
주인공은 항상 도망친다. 사고를 치고 감당하기 무서워 대충 수습하고 도망친다. 그러다 보니 몇 대 맞고 끝날 일은 주인공 한 명의 목숨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지경까지 온다.
하지만 주인공은 수많은 일을 겪고, 많은 사람을 만나며 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봄의 계절에서 성장한 주인공은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수습하기 위해 떠난다.
어중간한 재능과 마음가짐으로 아득바득 살아가는 주인공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점점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기꺼웠다.
"무림사계"는 몇 번이나 다시 돌려본 소설이다. "명작은 그 전개와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번 찾게 되는 것."이라는 말처럼. 적어도 필자에게는 모든 내용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찾아보게 되는 소설이다.
현실적인 무림의 이야기가 보고 싶은 사람, 무림 느와르가 보고 싶은 사람, 필력과 흡입력이 좋은 무협 소설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정말 좋아할 책이라고 생각된다.
단, 기연과 낭만, 로망이 넘쳐나는 무협 소설이나. 주인공의 능력이 엄청나서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부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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